일본야구, 혹사의 기준에 답한다

그랬던 적이 있었다. 세밀한 ‘스몰볼’의 일본식 야구와 화끈한 ‘빅볼’의 메이저리그식 야구가 경쟁을 펼친 줄 알았던 시절 말이다. 2000년대 후반 김성근 감독이 이끌던 SK 와이번스와 제리 로이스터 감독이 지휘봉을 쥐었던 롯데 자이언츠는 야구 스타일에서 대척점에 있었다. SK 재임 시절 김 감독의 야구 스타일은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경계가 없는 투수 보직과 혹사 논란은 여전했다.

다만, 결과가 달랐을 뿐이다. SK 재임 시절 김 감독은 ‘한국시리즈 우승’이라는 결과물로 모든 논란을 잠재웠다. ‘결과만 낸다면 어떤 과정이라도 정당화될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 전병두, 이승호, 정우람, 채병룡 등 당시 SK 주축 투수들은 마치 기계처럼 마운드에 올라 공을 던지고, 또 던졌다. 한 야구 관계자는 “SK 감독일 때도 혹사 논란이 많았지만, 한화에선 당시보다 ‘투수 과부하’가 더 심각해진 것 같다”며 한숨을 쉬었다.

1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났지만, ‘김성근식 혹사 야구’는 아직 현실 속에 있다. 수술 경력이 있는 신인 투수의 마구잡이식 기용은 ‘어깨 관절 와순 손상’이라는 결과를 낳았다. 감독의 지시대로 매번 마운드에 오른 베테랑 불펜 투수는 2년 연속 100이닝 소화를 앞두고 팔꿈치 통증으로 이탈했다. 무서운 건 벼랑 끝으로 몰리는 투수들이 더 많이 남아있다는 것이다.

더 큰 문제점은 따로 있다. 감독 스스로가 혹사의 기준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김 감독은 8월 23일 경기 전 어깨 부상을 입은 ‘영건’ 김민우 질문을 받았다. 김 감독은 이에 대해 “투수는 팀이 필요로 할 때 경기에 나가는 것이다. 혹사의 기준이 무엇인가 묻고 싶다”며 되레 반문했다. 김민우의 부상과 관련해선 단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김민우의 어깨 손상과 혹사는 관계가 없다는 뜻을 돌려 전한 것으로 해석된다.

일본 불펜 투수들은 얼마나 공을 던졌나

소프트호크 뱅크스의 마무리 투수 사파테. 53경기에 51.2이닝으로 팀 불펜진에서 가장 많은 투구를 소화했다(사진=소프트뱅크)

소프트호크 뱅크스의 마무리 투수 사파테. 53경기에 51.2이닝으로 팀 불펜진에서 가장 많은 투구를 소화했다(사진=소프트뱅크)

 

일본에서 고교 때까지 선수로 뛴 김 감독은 ‘일본식 스몰볼’을 추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데이터 야구’와 ‘벌떼 야구’로 포장됐고, 김 감독이 일본 야구 스타일을 대표하는 것으로 잘못 인식됐다. 하지만, 아니다. 김성근식 야구는 과거 영상에나 찾아볼 수 있는 ‘철지난 옛날 이야기’다. 당장 올 시즌 일본 프로야구 기록만 살펴봐도 김 감독과 같은 마운드 운영을 하는 팀은 찾을 수가 없다. 김 감독이 궁금해하는 혹사의 기준은 김 감독이 동경하는 일본 야구의 기록이 답해줄 수 있지 않을까.

일본 프로야구 각 팀의 이닝 소화 상위권 불펜 투수들의 기록(8월 23일 기준)을 살펴보자. 먼저 이대호가 활약했던 소프트뱅크 호크스는 올 시즌 퍼시픽 리그 1위를 달리고 있다. 112경기를 소화한 가운데 주요 불펜 투수들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소프트뱅크 주요 불펜투수 기록(그래픽=엠스플뉴스 배지헌 기자)

소프트뱅크 주요 불펜투수 기록(그래픽=엠스플뉴스 배지헌 기자)

한국 야구팬들에게도 유명한 오오타니 쇼헤이의 소속팀 닛폰햄 파이터스는 퍼시픽 리그 2위다. 113경기를 소화한 가운데 주요 불펜 투수들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니폰햄 주요 불펜투수 기록(그래픽=엠스플뉴스 배지헌 기자)

니폰햄 주요 불펜투수 기록(그래픽=엠스플뉴스 배지헌 기자)

한국 투수 이대은이 뛰는 지바 롯데 마린스는 퍼시픽리그 3위다. 114경기를 소화한 가운데 주요 불펜 투수들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지바롯데 주요 불펜투수 기록(그래픽=엠스플뉴스 배지헌 기자)

퍼시픽 리그 상위 3팀의 불펜진을 살펴보면 꽤 많은 경기를 소화했음에도 60이닝을 넘긴 불펜 투수는 한 명도 없었다. 개인 등판 기록을 고루 살펴봐도 3연투 이상을 소화한 사례는 손에 꼽을 정도다. 한 경기 이닝 소화에서도 최대한 1이닝 이내로 투구하도록 관리하는 상황이다.

선발이 약하면 어쩔 수 없다?

한화 투수 송창식은 웬만한 선발 투수와 비교해도 이닝 소화에서 밀리지 않는다. 불펜 보직임에도 벌써 100이닝에 육박하고 있다(사진=한화)

한화 투수 송창식은 웬만한 선발 투수와 비교해도 이닝 소화에서 밀리지 않는다. 불펜 보직임에도 벌써 100이닝에 육박하고 있다(사진=한화)

 

퍼시픽리그의 반대편 리그인 센트럴 리그는 다른 게 있을까. 60이닝을 넘긴 불펜 투수들이 몇몇 있지만, 퍼시픽리그와 크게 다른 점은 보이지 않는다.

히로시마 카프(센트럴 리그 1위-116경기 소화)

히로시마 주요 불펜투수 기록(그래픽=엠스플뉴스 배지헌 기자)히로시마 주요 불펜투수 기록(그래픽=엠스플뉴스 배지헌 기자)

요미우리 자이언츠(센트럴 리그 2위-113경기 소화)

요미우리 주요 불펜투수 기록(그래픽=엠스플뉴스 배지헌 기자)요미우리 주요 불펜투수 기록(그래픽=엠스플뉴스 배지헌 기자)

한신 타이거즈(센트럴 리그 4위-117경기 소화)

한신 주요 불펜투수 기록(그래픽=엠스플뉴스 배지헌 기자)한신 주요 불펜투수 기록(그래픽=엠스플뉴스 배지헌 기자)

이 시점에서 떠올릴 수 있는 김 감독의 주장이 있다. “선발 투수가 못 버텨주니 어쩔 수 없다”는 김 감독의 해명이다. 선발진이 약하니 불펜 투입이 빨라지고, 많아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일본 프로야구에서도 선발진이 허약하면 한화와 같이 ‘마구잡이 투수진’을 운영할까. 양대 리그 평균자책 최하위 두 팀의 불펜 기록을 살펴보자.

오릭스 111경기 소화(퍼시픽리그 평균자책 최하위 4.03, QS 5위 57회)

오릭스 주요 불펜투수 기록(그래픽=엠스플뉴스 배지헌 기자)오릭스 주요 불펜투수 기록(그래픽=엠스플뉴스 배지헌 기자)

야쿠르트 117경기 소화(센트럴리그 평균자책 최하위 4.90, QS 최하위 51회)

야쿠르트 주요 불펜투수 기록(그래픽=엠스플뉴스 배지헌 기자)야쿠르트 주요 불펜투수 기록(그래픽=엠스플뉴스 배지헌 기자)

상기 두 팀 모두 일본 프로야구에서 마운드가 좋지 않은 팀이다. 선발진의 퀄리티 스타트(QS, 6이닝 3실점 이하)기록도 상대적으로 좋지 않다. 하지만, 선발진의 실력이 상대적으로 약한 상황에서도 불펜진의 이닝 소화가 다른 상위권 팀들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선발진이 부진하다고, 무리한 퀵후크와 핵심 불펜 투입을 남발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10,000구를 넘긴 한화 불펜의 현실

한화 투수 권혁은 2년 연속 100이닝 소화을 앞두고 있었다. 철완과도 같았던 그도 결국 무너졌다(사진=한화)한화 투수 권혁은 2년 연속 100이닝 소화을 앞두고 있었다. 철완과도 같았던 그도 결국 무너졌다(사진=한화)

 

이제 한화의 올 시즌으로 돌아가 보자. 한화는 8월 24일 기준 112경기를 소화한 가운데 팀 평균자책 9위(5.80), 퀄리티 스타트 최하위(17회)에 머물러 있다. 올 시즌 선발진은 443이닝, 불펜진은 561이닝을 소화했다. 유일하게 불펜진의 이닝 소화가 선발진보다 많은 팀이 한화다. 올 시즌 한화 불펜진은 10,006개의 투구수를 기록했다. 10개 팀 가운데 유일하게 10,000개 이상의 공을 던졌다.

한화 주요 불펜투수 기록(그래픽=엠스플뉴스 배지헌 기자)한화 주요 불펜투수 기록(그래픽=엠스플뉴스 배지헌 기자)

일본 프로야구팀들의 불펜진 기록을 머리에 새기고, 위 한화 불펜진의 기록을 살펴본다면 얼마나 심각한 마운드 운영인지 곧바로 느낄 수 있다. 특히 송창식과 권혁의 혹사는 심각한 수준이다. 2년 연속 100이닝 소화를 앞뒀던 권혁은 팔꿈치 통증으로 24일 1군에서 말소됐다. 24일 경기에도 등판한 송창식이 아직까지 잘 버티고 있는 게 신기할 정도다. 심수창과 장민재도 선발과 불펜을 오가면서 쉼 없이 공을 던지고 있다.

심수창은 8월 들어 기괴한 투구 일정까지 받아들여야 했다. 8월 4일 KIA전(3.2이닝)에서 선발 등판한 심수창은 3일 뒤인 7일 NC전(1.1이닝)에서 구원 등판했다. 그리고 이틀을 쉰 뒤 10일 삼성전(2이닝)에서 다시 선발 등판했다.

이게 끝이 아니었다. 3일 뒤인 13일 KIA전(4이닝) 선발 투수는 또 다시 심수창이었다. 다시 불펜으로 돌아온 심수창은 15일부터 21일 사이엔 5연투까지 소화했다. 프로야구에선 좀체 상상하기 힘든 기용 방식이었다.

더 섬뜩한 점은 이제 KBO리그가 막판을 향해 달리고 있다는 것이다. 김 감독은 가을 야구를 위한 승부처라는 이유로 불펜 혹사를 더욱 정당화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잇따른 연투와 등판 과다 등으로 관리를 못 받은 불펜진은 점점 지쳐가고 있다. 큰 부상의 위험성도 점점 커진다. 팬들은 자신이 응원하는 팀의 소중한 선수를 허망하게 잃어버리고 싶지 않다. 구단 역시 선수가 소중한 자산인 만큼 비상식적이고도 전근대적인 투수진 운용으로 선수들을 잃고 싶어하지 않는다.

앞에서 기술했듯 현대 일본 프로야구에선 김성근식 야구는 어디에도 없다. 한화보다 경기를 더 많이 소화한 팀이 수두룩하지만, 한화 같은 혹사의 느낌을 받긴 어렵다. “어깨는 쓰면 쓸수록 강해진다”는 김 감독의 얘기는 과학적 근거가 없는 공허한 메아리일 뿐이다. 아니 차라리 미신에 가깝다. 2016년 한화의 야구는 한 마디로 ‘국적 불명의 야구’다. 김성근식 야구 역시 일본식이 아닌 세상 어디에도 없는 ‘김성근식 야구’일 뿐이다.

김성근 한화 감독이 질문한 “혹사의 기준이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하겠다. 지난해와 올 시즌 김 감독의 투수진 운영이 바로 혹사의 기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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